서명권자가 모두 퇴사한 회사는 어떻게 될까요 — 7년 만에 은행에 불려간 이야기
오늘 쿠웨이트에 있는 은행에 다녀왔습니다.
7년 전에 등록해 둔 서명권 때문입니다.
저 혼자 등록했던 것이 아닙니다
7년 전, 쿠웨이트에 법인을 세우는 일을 맡아 진행했습니다. 설립 절차의 마지막쯤 은행 계좌를 열면서 계좌의 서명권자(authorized signatory)를 등록했습니다.
그때 등록된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. 그 회사 쪽 담당자들도 함께 올라갔습니다.
당시에는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습니다. 여러 명이 등록되어 있으니 누구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워도 회사 업무가 멈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.
7년이 지났습니다.
그사이 함께 등록됐던 그 회사 담당자들이 한 명씩 퇴사했습니다. 마지막 한 사람까지 회사를 떠나면서, 등록된 서명권자 중에 그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됐습니다.
남은 등록자는, 7년 전에 일을 마치고 떠난 저 하나였습니다.
사람은 있는데 서명할 사람이 없는 회사
회사는 그대로 있습니다. 대표도 있고 직원도 있고 업무도 돌아갑니다.
그런데 은행 업무를 처리하려니 현직자 중에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.
한국에서라면 이런 상황은 대체로 풀립니다. 사정을 설명하고, 재직증명과 위임장을 준비하고, 필요하면 서류를 보완합니다. 담당자가 판단해서 처리해 주는 여지가 있습니다.
걸프 지역 행정에는 그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.
은행 시스템에 등록된 사람이 누구인지가 전부입니다. 지금 그 회사의 실제 대표가 누구인지, 그 사람이 회사 도장을 들고 왔는지는 창구에서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. 등록된 사람이 직접 오거나, 정식 절차를 밟아 서명권자를 바꾸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.
그리고 그 변경 절차가 또 하나의 일입니다. 이사회 결의서를 만들고, 공증과 인증을 거치고, 은행에 제출하고, 새 서명권자가 직접 나와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. 몇 주가 걸립니다.
그래서 회사 입장에서는, 7년 전에 떠난 사람에게 연락해 부탁하는 쪽이 오히려 빠른 길이었던 것입니다.
복수로 등록하면 안전하다는 착각
이 일에서 제가 배운 것은 "여러 명을 등록해 두면 된다"가 틀렸다는 것입니다.
여러 명을 올려도 그 사람들은 결국 회사를 떠납니다. 주재원은 임기가 끝나고, 담당자는 이직하고, 임원은 교체됩니다. 3년이면 절반이 바뀌고, 7년이면 전부 바뀝니다.
문제는 사람이 나갈 때 서명권은 따라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.
퇴사 처리는 인사팀이 합니다. 이까마 취소나 급여 정산은 절차에 들어 있습니다. 그런데 그 사람이 은행 계좌의 서명권자였다는 사실은 대개 아무 문서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. 몇 년이 지나면 회사조차 지금 누가 등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.
그러다 급하게 은행 업무가 필요한 날, 그제야 알게 됩니다.
사우디에서는 더 자주 생깁니다
사우디에서 법인을 세우면 "누가 이 회사를 대표하는가"가 여러 곳에 따로 등록됩니다.
투자등록(MISA)에 올라가는 사람, 상업등기(CR)의 지배인, 정관에 명시되는 권한 범위, 은행 계좌의 서명권자, 정부 포털의 계정 관리자. 이 다섯이 각각 다른 서류에 기록됩니다.
문제는 사우디 법인의 주재원 교체가 잦다는 점입니다. 임기 2년에서 3년으로 돌아가는 회사가 많고, 그때마다 이 다섯 곳을 함께 정리해야 합니다.
하나라도 빠뜨리면 그 자리가 비는 것이 아니라, 떠난 사람의 이름이 그대로 남습니다. 서류상으로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전임자가 여전히 그 회사의 서명권자입니다.
이까마가 만료된 사람은 등록 자체가 무효가 되기도 합니다. 그러면 은행 업무도, 포털 접근도 함께 막힙니다.
지금 확인해 보실 것
이미 사우디에 법인이 있으시다면, 오늘 이 다섯 가지를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.
지금 우리 회사의 서명권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. 이름을 바로 대지 못하신다면 이미 점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.
그 사람들이 지금도 재직 중입니까. 등록된 사람 중 이미 퇴사했거나 귀국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십시오.
이까마가 유효합니까. 만료됐다면 서명권도 함께 멈춰 있을 수 있습니다.
퇴사 절차에 서명권 이관이 들어 있습니까. 인수인계 체크리스트에 이 항목이 없다면 지금 넣으셔야 합니다.
MISA·CR·정관·은행·포털의 이름 표기가 서로 일치합니까. 여권 영문 철자와 아랍어 음차가 문서마다 다르면 변경 단계에서 반려됩니다.
설립을 준비 중이시라면, 계좌를 열기 전에 이 구조를 먼저 정하시길 권합니다. 단독 서명인지 공동 서명인지, 권한 범위를 어디까지 줄 것인지,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시작하는 것과 필요해진 뒤에 알아보는 것은 다릅니다.
등록은 시작이고, 관리가 본체입니다
법인 설립은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면 끝나는 일처럼 보입니다.
실제로는 그때 등록한 내용이 이후 몇 년의 운영 방식을 정합니다.
저는 오늘 그 대가로 쿠웨이트에 다녀왔습니다. 7년 전에는 여러 명을 등록해 뒀으니 됐다고 생각했지만, 사람이 바뀔 때마다 등록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챙기지 못했습니다.
설립 절차를 여러 번 해 본 사람은 지금 이 서명이 나중에 어떤 상황을 만드는지 압니다. 저희가 설립 단계에서 서명권 구조를 함께 설계하고, 설립 후 관리에 등록 정보 점검을 넣어 두는 것은 그래서입니다.